P.I.Tchaikovsky - Piano Concerto No. 1, op. 23
Classical Music/Story of Pieces

P.I.Tchaikovsky - Piano Concerto No. 1, op.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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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Tchaikovsky Piano Concerto No. 1

피아노 :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 지휘 :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Pianist : Vladimir Horowitz | Conductor : Arturo Toscanini

 

 

2021 도쿄 올림픽에서 러시아 국가 대신 러시아를 대표하는 그 음악

 

 

 

 

 

 


 

러시아 선수들은 이번 올림픽에 자국 국기와 국가명을 사용할 수 없다.

이는 스포츠중재재판소(CAS)가 주요 국제스포츠대회에서 러시아의 참가를 제한했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4년간 하계와 동계 ‘대다수’ 종목에서 도핑 샘플을 조작했고,

특히 개최국으로서 1위를 차지한 2014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도핑과 그 은폐를 국가 차원의 지원 속에서 광범위하게 저질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후 러시아 선수들은 올림픽 출전 제재 대상이 됐다.

 

다만, 징계범위는 국가 자격으로 제한해 러시아 선수들은 이번 도쿄 올림픽에 러시아올림픽위원회(ROC) 소속으로 참가했으며,

현재 30개 종목 300여 명의 선수가 출전 중이다.

러시아올림픽위원회 소속으로 도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러시아 선수들이 단상에 서면 러시아 국가가 아닌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이 연주된다.

 


 

이 곡은 음반이라는 새로운 미디어가 발매되기 시작할 무렵부터 지금까지

일반적인 경우 다른 음반사나 자사의 레퍼토리와 겹치는 경우 레코딩을 회피하곤 했지만,

모든 피아니스트들이 상업적 비즈니스의 이해관계와는 상관없이 한 번 이상은 반드시 녹음해야만 할 정도로 융숭한 대접을 받고 있다.

CD로 발매된 종류만 해도 무려 150종이 넘는 음반이 발매되었으니(복각되지 않은 LP시대의 녹음까지 합하면 더 많을 듯하다), 단연 최고의 베스트셀러 레퍼토리임을 확인할 수 있다.

 


 

차이코프스키의 얼룩진 삶에 끈질기게 실처럼 따라다녔던 것은 신경쇠약 증세였다.

성공보다는 실패에 더 민감했던 차이코프스키는 그가 음악의 구세주라고 생각했던 모차르트와 자기 자신을 비교하며 형식미와 구성력의 부족함을 특히 한탄했다.

 

자기 자신에 대해 항상 비판하고 회의했던 그는 이 피아노 협주곡 1번에 대해서도 확신을 가지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의 스승이자 당시 러시아 피아니즘의 대부로 손꼽히던 니콜라이 루빈스타인(Nikolay Rubinstein)에게 이 작품을 보냈고 그의 의견을 기다렸으나, 결과는 참담했다.

 

루빈스타인은 이 작품을 엉뚱하고 기괴하며 거북스럽기 그지 없는, 한마디로 구제불능의 곡이라고 신랄한 평을 서슴치 않았다.

문제는 연주하기에 너무 어렵고 악정들은 너무 잘게 조각 나 있으며 서투르게 취급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덧붙여 이런 2류 작품은 반드시 대대적으로 수정을 해야만 자신이 연주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격분한 차이코프스키는 독일의 명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인 한스 폰 뷜로(Hans Von Büllow)에게 이 작품을 헌정했다.

이 작품의 가치를 인정했던 뷜로는 이 곡을 미국 연주회 도중 1875년 10월 25일 벤저민 존슨 랑의 지휘와 함께 보스턴에서 초연했고, 대성공을 거두었다.

같은 해 모스크바에서도 연주해 호평을 받게 되었다.

결국 3년 뒤에는 루빈스타인이 직접 화해를 구하게 되었고 두 사람의 우정은 다시 회복되었다고 한다.

 


 

위 연주의 호로비츠와 토스카니니는 사위와 장인어른의 관계이다.

호로비츠는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들 중 하나였으며, 토스카니니 또한 20세기 최고의 지휘자중 하나다.

1933년 베토벤의 5번째 피아노 협주곡 '황제'의 협연을 기점으로 그들에게 인연이 생기게 되었고, 호로비츠는 토스카니니의 딸 완다와 결혼하였다.

 

호로비츠는 자의식이 강하고 개성있는 음악가였다.

그러나 토스카니니와의 음악적 마찰에서 빚어진 논쟁은 이기는 경우가 드물었으며, 토스카니니와의 잦은 협연 속에서 토스카니니의 엄격한 요구사항들에 진이 빠지도록 그에게 맞추다보니 이전의 자신의 색깔을 점점 잃어갔고 그의 연주에는 토스카니니에 대한 두려움만이 흘렀다.

당시 모든 사람들이 그러한 그의 기색을 그의 음악에서 읽었으며, 그의 딸 소냐조차도 사위와 장인어른의 협연 리허설을 보고 "아빠는 거기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할아버지는 거기서 모든 시간 동안 열심히 하더라고요" 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위에 실린 1943년 연주의 음반은 1941년의 음반 때와 같은 RCA Victor 사에서 발매되었고, 음악적으로도 1941년판과 크게 변한 부분이 없다.

이 시기는 정말로 호로비츠가 토스카니니와의 마찰 속에서 정신적으로 힘들어했던 시기여서 그 시기의 음악적인 성향이 여지없이 담겨있다.

 

비평가들은 호로비츠와 토스카니니의 연주를 (아르투르)루빈스타인(Arthur Rubinstein)과 바비롤리(Sir John Barbirolli)의 1932년 연주와 비교하며 좋지 않은 평을 했다.

주요 문제는 루빈스타인 역시 RCA Victor 사의 연주자였다는 사실이다, 루빈스타인은 RCA Victor가 자신의 음반이 이미 있는데도 불구하고 동곡의 연주를 발매한 것도 모자라 호로비츠와 토스카니니의 연주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연주"라고 광고한 사실에 엄청나게 분개했다.

루빈스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 연주를 사서 들어보았는데 나는 먼저 곡과 어울리지 않는 연주자와 지휘자에 놀랐고, 두 번째로는 녹음이 기술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에 놀랐다. 내 의견을 내가 만난 사람들과 공유했고, 바비롤리와 협연한 내 연주가 훨씬 낫다는 소리를 들어 기뻤다."

 


 

이와 별개로 이 연주 자체는 당대의 많은 사람들이 찬사를 보냈고

현대의 사람들까지도 가히 최고의 연주로 꼽고 있다.

 

 

음악가에게 그 음악가가 이렇게 연주할 것이다라고, 이 곡은 이렇게 연주되어야 한다고,

음악가와 음악에 대해서 어느정도 당연한 것으로 기대되어

정석처럼 굳어진 몇몇 부분들에 있어 닫혀있던 여느 귀들과는 달리

관대하게 열린 청각으로 음악을 들을 수 있었던 세상의 많은 귀들은, 이 연주를 좋아했다.

 

이 연주는 1943년 4월 25일 부활절 주일 카네기홀에서 공연되어 그 수익을 국채 운동 기금으로 사용, 미국 국채 운동의 클라이막스로 자리매김한 전설적인 연주이다.

공연 입장료는 $25부터 $50,000까지의 채권 구입으로 쓰였는데,

미국 재무부에서는 약 $6,000,000의 기금이 모일 것이라 예상했지만 현실은 그를 훌쩍 뛰어넘어 $10,190,045라는 거액이 모였다.

오후 5시부터 오후 6시까지 전국에 실황으로 방송되며 유선으로도 상당한 관심이 집중되었는데,

국채 운동의 일환이었던 공연이 이와 같은 성황리에 마감되어 미국 전역에 감동적인 역사의 한 순간을 새로 썼다.

 

시기적으로도 호로비츠의 절친한 음악적 친구였던 라흐마니노프의 사망 1달 후에 공연되어,

라흐마니노프의 사망 이후 대부분의 공연을 취소했던 호로비츠가 유일하게 이 공연 하나만은 취소하지 않았다는 사실로 미루어 대단히 유의미한 공연이다.

 


참고

[네이버 지식백과]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Tchaikovsky, Piano Concerto No. 1] (클래식 명곡 명연주, 박제성)

[컬쳐 매거진] 도쿄올림픽: 러시아 시상식에 ‘차이코프스키’가 연주되는 이유 (안영길, 2021.08.03)

[네이버 블로그][소향친구][1942-43] 라흐마니노프의 마지막

[네이버 블로그][소향친구][1939-40] 완전한 복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