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구부러진 길 - 이준관
구부러진 길 나는 구부러진 길이 좋다. 구부러진 길을 가면 나비의 밥그릇 같은 민들레를 만날 수 있고 감자를 심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날이 저물면 울타리 너머로 밥 먹으라고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 구부러진 하천에 물고기가 많이 모여 살 듯이 들꽃도 많이 피고 별도 많이 뜨는 구부러진 길, 구부러진 길은 산을 품고 마을을 품고 구불구불 간다. 그 구부러진 길처럼 살아온 사람이 나는 또한 좋다. 반듯한 길 쉽게 살아온 사람보다 흙투성이 감자처럼 울퉁불퉁 살아온 사람의 구불구불 구부러진 삶이 좋다. 구부러진 주름살에 가족을 품고 이웃을 품고 가는 구부러진 길 같은 사람이 좋다.
장미와 가시 - 김승희
장미와 가시 눈먼 손으로 나는 삶을 만져 보았네. 그건 가시투성이였어. 가시투성이 삶의 온몸을 만지며 나는 미소 지었지. 이토록 가시가 많으니 곧 장미꽃이 피겠구나 하고 장미꽃이 피어난다 해도 어찌 가시의 고통을 잊을 수 있을까 해도 장미꽃이 피기만 한다면 어찌 가시의 고통을 버리지 못하리오. 눈먼 손으로 삶을 어루만지며 나는 가시투성이를 지나 장미꽃을 기다렸네. 그의 몸에는 많은 가시가 돋아 있었지만, 그러나, 나는 한 송이의 장미꽃도 보지 못하였네. 그러니, 그대, 이제 말해주오. 삶은 가시장미인가 장미가시인가 아니면 장미의 가시인가, 또는 장미와 가시인가를.
골목 - My
골목 우리는 모두 골목을 가꾼다. 차례차례로 사람이 생기고 집이 뻗고 차가 무르익는 골목 사랑, 고마움, 편안함이라고 이름 붙은 벽돌 한 칸 씩을 돌아가며 쌓아 저 푸른 대문집이 지어졌고 웃음기 가득한 표정을 차체 삼아 이야기 꽃 시끄러운 공정을 거치니 저 파란 승용차가 만들어졌다. 손가락으로 그 어디를 가리켜도 누가 사는 집인지, 누구의 차인지 금세 대답되는 골목 하기야 나무에 물 주듯 시간이 뿌려져서는 과일 같은 미소가 주렁주렁 열리고 이름 없는 추억들이 손을 뻗어 파랗게, 우리들을 따먹었는 것을. 밤을 버티다 해 뜨면 스러지는 아침 안개 같은 청춘이어도 그 밤의 골목은 강철일 것이다. 여러분은 골목, 잘 가꾸고 있나?
밤하늘의 거울 - My
밤하늘의 거울 매일같이 돌아보는 여린 밤하늘은 나의 거울 내가 사랑한 밤하늘 속 작은 손에 살갑게 닿였던 별을 비춰보고 작은 발을 동동구르게 한 꿈을 비춰보고 언제인가 볼에 뜨겁게 그을린 사랑도 비추어 보고 나는 거울 조각 하나에 몸을 닿이고 셈없는 아름다움에 베인 듯 여전히 멀고 허전한 밤하늘을 보다가 마지막으로 비춰지는 눈시울의 슬픔과 만난다. 그래 저 한없이 아름다운 구석에 박힌 별처럼 외로운 은하수 흐르는 이야기가 아득히 들려오는 것만 같은 밤 나는 스르르 … 별발에 탄다.
석류 - 이가림
석류 언제부터 이 잉걸불 같은 그리움이 텅 빈 가슴 속에 이글거리기 시작했을까 지난 여름 내내 앓던 몸살 더 이상 견딜 수 없구나 영혼의 가마솥에 들끓던 사랑의 힘 캄캄한 골방 안에 가둘 수 없구나 나 혼자 부둥켜안고 뒹굴고 또 뒹굴어도 자꾸만 익어가는 어둠을 이젠 알알이 쏟아놓아야 하리 무한히 새파란 심연의 하늘이 두려워 나는 땅을 향해 고개 숙인다 온몸을 휩싸고 도는 어지러운 충만 이기지 못해 나 스스로 껍질을 부순다 아아, 사랑하는 이여 지구가 쪼개지는 소리보다 더 아프게 내가 깨뜨리는 이 홍보석의 슬픔을 그대의 뜰에 받아주소서